인더스 문명의 유적지 모헨조다로는 기원전 4000년경 지어진 고대 도시이다. 도로, 학교, 회의장, 곡물 저장소, 공중목욕탕 등이 있던 계획도시였다. 그 중 목욕탕은 세상 사람들은 놀라게 했다.
유적지 한가운데에서 길이 11.8미터, 폭 7미터, 깊이 2.4미터 규모의 대형 목욕탕이 있었다. 목욕탕 안에는 물이 나왔을 것으로 보이는 6개의 구멍도 있었다. 그 당시에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다 목욕탕을 만들었다는 것에 역사학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르키메데스의 부력의 원리
고대 그리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 안에서 부력의 원리를 알아냈다. 그리스 공중목욕 역사는 기원전 6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4세기에 건립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청년들과 함께 지식을 나누고, 철학 강의가 시작된 숲 속의 학교)은 그리스 남성들이 함께 운동이나 공부를 한 뒤 목욕을 하던 연무장의 일부였다고 한다.
성매매 장소
로마시대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사라진 폼페이 유적에 화려한 목욕탕이 존재했다. 탈의실과 운동 기구까지 갖춘 목욕탕 한쪽에는 성관계 묘사 그림도 그려져 있다. 목욕탕과 성매매 장소가 연결되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제국 황제들과 공중목욕탕
로마제국 시대 폭군 칼라굴라 황제는 216년, 축구장 4개를 합한 규모로 한번에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목욕탕을 짓는다. 목욕탕뿐 아니라 도서관, 강연장, 집회실, 체육관까지 갖춘 종합 시설이었다.
30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3천명이 동시 입장할 수 있는 목욕탕을 만들었다. 목욕탕이 어찌나 크고 화려한지, 목욕탕에서 발굴한 청동 작품과 대리석 등만으로도 박물관 하나를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세신사에게 지불할 돈이 없어 벽에 등을 문지르던 퇴역 군인에게 돈과 노예를 하사했다. 이 소식으로 시민들은 황제가 다니는 목욕탕으로 향했고 벽에 등을 문질렀다. 황제는 서로 등을 밀어주라는 지혜로운 말을 했다. 황제와 시민들이 다 벗고 같은 공간에서 목욕을 할 만큼 공중목욕탕에서만큼은 신분의 차이에서 자유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로마의 목욕 문화는 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 Edward Gibbon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호화로운 목욕 문화가 로마를 멸망으로 이끈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중세 유럽의 목욕 문화
신에게 기도를 드리기 전 몸을 청결히 하는 것을 의무로 여겼던 이슬람교와 달리 중세 기독교인들은 씻지 않는 것을 도덕적 행위로 여겼다. 캐서린 애셴버그는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에서 “중세는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심한 시대였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도 한 달에 한 번만 목욕을 했다. 중세 유럽 사람들의 생활을 그린 그림에는 몸에서 이나 벼룩을 잡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십자군 원정 당시, 터키식 목욕탕 하맘Hamam을 보고 다시 유럽에서 목욕이 유행했으나 흑사병의 온상지로 목욕탕이 지목되었고 이로 인해 목욕탕은 사라지게 되었다.
잘 씻는 청결한 사람이 상류층
19세기 이후 유럽은 잘 씻는 청결한 사람이 상류층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1842년 영국의 배스Bath 지역에 공동 세탁장 겸 목욕장이 개장했다. 1846년에는 목욕탕에 관한 법률도 만들었다. 지역 이름, 배스Bath는 목욕이라는 영어 단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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